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솜 전투 (문단 편집) == 전투 경과 == [[파일:솜전투.png]] 솜 전투 전개도. [[7월]]~[[11월]] 헤이그는 세르에서 몽토방 일대의 방어선을 돌파한 후 포지에르와 긴치를 연결하는 선까지 달려나갈 계획을 세웠다. 포지에르~긴치 라인을 점령하면 후속 돌파는 매우 용이할 것으로 본 헤이그는 영국 제4군을 최선봉에 세우며 돌파력을 강화시켰고 좌우에서 제3군과 프랑스 제6군이 조공을 담당했다 영국 육군이 [[6월 24일]]부터 8일간 준비포격을 가하면서 피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이어 7월 1일 오전 7시 30분에 돌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독일 육군의 종심방어망은 소나기처럼 뿌려댄 포격에도 대부분 남아있었다. [[포병]]이 다 때려부쉈으니 총 들고 유유히 걸어가 [[깃발]]만 꽂으면 될 것으로[* 격렬한 포격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무거운 건설자재들을 나르던 공병부대들도 진격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복구는커녕 건설자재들과 함께 떼죽음 당했다. 이는 모두 그 형편없는 수준의 포격으로도 독일군이 전멸했을 거라 판단한 무능한 지도부의 오판으로 인한 것이었다.] 전달받았던 영국군의 [[보병]]들은 개전 첫날부터 대량학살을 당한다. 애초에 방어선의 대부분이 건재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 게다가 폭약 지뢰까지 심어놓아 영국의 피해는 급증했고 돌격속도는 극도로 위축되었다. 그나마 숙련된 정예병들로 구성된 부대들은 초반에 기관총 공격을 받고 사상자가 나자 바로 상황파악을 하고 신속하게 은엄폐 및 분산 기동에 들어가 피해를 최소화했으나, 대부분의 영국군은 기초훈련만 받고 투입된 징병자원 혹은 민간인 지원병들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대처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전멸하고, 곰쿠르와 프리쿠르 등 진지를 최종 점령한 곳도 당장 방어전이 가능한 멀쩡한 병력은 총원의 몇분의 1도 안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단 하루만에 5만 8천 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그중 2만 명은 전사자 혹은 실종자였다. 심한 곳에서는 기관총반 1~2분대에게 [[대대]]급 병력이 쓸려버린 곳도 있었다고 한다. 공격준비 포격이 효과를 거두지 못한 까닭으로는 여러 요인이 제기되었다. * 영국 육군 포탄의 품질이 불량하여 [[불발탄]]이 많이 나왔다. * 방어진지 파괴에 효과적인 중포의 수가 현저히 적었다. * 솜 지방의 무른 토질 때문에 포탄이 제대로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실제로 당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에서는 경작지 개간 중에 불발탄이 심심찮게 나온다고 한다. * 독일 육군의 참호의 깊이가 수미터에 달해서 모두 제압할 수 없었다.[* 참호 깊이가 그렇게 깊다면 방어사격은 어떻게 할까도 싶은데, 일반적인 참호는 사격 시 발을 디뎌 서기 위한 발판이 있었기 때문에 참호 깊이가 수미터에 달해도 사격엔 전혀 지장이 없었다.] * 독일군이 포격 시 기관총을 해체시켜 안전한 곳으로 신속하게 옮기는 훈련을 통해 대비하였다. * 무작정 많은 수의 야포를 동원하다 보니 심각한 사거리 격차가 발생하였다. 프랑스 육군의 포는 목표거리를 달성했지만, 영국 육군이 끌고 온 소구경 야포의 포격은 목표점에 닿지 못하고 중간에 떨어졌다. * 영국 육군이 쓴 포탄의 대부분은 구조물을 효과적으로 부술 수 있는 고폭탄(High Explosive-HE)이 아니라, 참호나 철조망 등의 시설물의 파괴를 기대할 수 없는 인마살상용 유산탄(shrapnel)[* 적은 폭약과 대량의 파편을 탑재한 포탄. 개활지의 보병을 공격할 때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지만 참호나 시설물에는 아무런 힘을 못 쓴다.]이었다. 보통이면 이렇게 피해가 크면 공세를 중지해야 정상이지만, 헤이그는 독일군 또한 막대한 피해를 입었을 거라는 오판을 했다. 그래서 공세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작전 방식만 좀 바꿔서 피해를 줄였을 뿐 공격은 5개월 이상 지속됐다. 독일 또한 초전의 대선전에 힘입어 항전의 의지를 내세웠고 방어와 동시에 때때로 반격을 통해 뺏긴 지역을 수복하기도 했다. 이렇게 피의 복수가 반복되는 와중에 영국군은 기어코 7월에 콩탈메종 등 독일 제2방어선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쌍방의 희생이 증가하는 가운데 7월 중순 독일 참모총장 팔켄하인이 베르됭의 공세를 중지시켰다. 솜의 전황이 더욱 중요하다 여긴 팔켄하인은 제1군을 새로 창설해 솜으로 보냈다. 인간 도살장은 8월 중순이 되어도 문을 닫지 않았다. 이는 사령부의 미친 짓과 오판이 가장 큰 원인이다. 헤이그는 닥공만 외쳤으며 주공을 담당한 롤린슨 4군 사령관은 거점 확보만 눈이 팔린 채 무식하게 무인지대를 뚫고 가라는 지시를 반복했다. 게다가 일선 지휘관 또한 돌파구 형성이 아닌 진지 점령만 하다보니 피를 안 흘릴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 결과 독일의 방어선이 현저히 약화되었음에도 영국의 피해는 늘어만 갔다. 하지만 최상부 참모진의 변화는 없었다. 영국은 더 강한 돌파를 주문했고 독일 또한 루프레히트 집단군을 새로 창설하면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런 와중에 8월 말 독일에서 팔켄하인이 경질되고 힌덴부르크가 참모총장에 오르면서 변화가 생기게 된다. 동,서부 무관하게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힌덴부르크는 공세를 전면중단시키고 수세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명령했다. 이를 통해 최전방의 병력배치는 대폭 줄이고 대신 기동방어를 채택해 대규모의 예비대를 종심에 배치하고 유사시 대처하도록 전략을 전면수정했다. 이러한 독일군의 변화를 영국측에서는 독일군이 붕괴한다는 조짐으로 받아들였다. 영국 본토로부터의 강한 압력을 받던 헤이그는 결정타를 가할 때라고 판단을 내리고 영국 제4군, 프랑스 제10군 및 영국 후방군을 동원해 9월 15일 공세를 감행한다. 독일 제3방어선인 모르발에서 구드쿠르 일대를 점령하려는 것이 공세의 목표였다. 이때 최초의 [[전차]]인 [[Mk 시리즈|Mark I]]이 등장했다. 전차를 내세운 영국군은 플레르와 쿠르슬레트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독일의 예비대가 동원되자 돌파는 중단되었고 다시 전선은 고착화되었다. 전차 또한 운용을 뒷받침할 기술과 작전술이 미성숙했기 때문에 전투에선 쓸 만해도 전술적이나 전략적인 돌파를 성공시키진 못했다. 또, 내구성이 최악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대다수가 고장나 퍼지고 말았다. 헤이그는 첫날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재차 공세를 명령했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7일 공세의 핵심 목표였던 티에프발을 점령하는데 이른다. 하지만 티에프발은 이미 독일에게 그다지 중요한 지역이 아닌 상황이었다. 10월 1일까지 대부분의 독일 제3방어선을 점령한 영국군은 10월13일 티에프발 일대의 레지나 라인을 공격했다. 이후 11월 르 사르의 요새와 보몽아멜의 보루를 점령하면서 솜 전투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